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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제주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작가들이 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하자마자 곧 찾아온 지난겨울에 제주에는 유독 많은 눈이 내렸다. 곶자
왈 지대에 있는 어느 날의 미술관은 며칠간 이어진 폭설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야말로 고립의 상태
였다. 그 겨울의 고요함은 작가들로 하여금 이곳 제주에 와 있다는 점을 강렬하게 환기시켜주었을 것이
다. 해가 바뀌어 전시 오픈을 얼마 남겨 두고 있지 않은 지점에서도 작가들은 '사려니숲에 다녀왔다',
'오늘은 마라도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는데, 그 숨 가쁜 일정 속에서 어떠한 설렘 같은 것이
함께 전해져 왔다. 제주라는 섬이 그들의 작업에 몰입과 동력을 일으키는 새로운 환경임은 분명해 보였다.
사람은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고립과 고독감을 겪는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무엇으로부터 단절된 상황
에서 고립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 단절을 함의하는 이미지들이 전시실 곳곳에
펼쳐져 있다. 어떤 이유로 마라도에 와 있었는지 알 길 없는 몸통을 잃어버린 나무뿌리, 숲의 일부이기
도 하지만 개별적 존재로서 고유한 이름이 있는 수많은 나무들, 역사적 상처를 겪은 장소로서의 사실은
묻혀 그저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알려진 정방폭포, 아무것도 없는 공간의 암흑 속에서 그 어떤 것과의
상호작용 없이 색을 발하는 가느다란 몇 줄기의 빛과 같은 것들이다.
단절과 고립은 우리 삶의 반경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작동되고 있을까? 사실로부터의 단절은 가
장 흔히 사람들이 행하게 되는 고립의 형태인 것 같다. 이것인지, 저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떤 불
명확함 혹은 불확실함 앞에서 자유롭기란 무척 어렵다. 가던 길을 멈추거나 헤매게 된다. 때로는 그 헤
맴에 그럴듯한 추정과 상상을 등장시켜 상황을 왜곡하고 악화시키기도 한다. 눈앞의 평범한 풍경이 기
묘한 효과음과 만나 흔들리는, 그리고 불분명한 형상으로 제시되는 작품 <파장>은 내부의 어떤 불안이
자극될 때, 우리의 인식과 감정이 사실로부터 멀어지는 상황을 그려낸다. 그저 평범한 아파트, 하늘, 나
무와 같이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그 자체로 경험하지 못한 채로, 엉뚱하게 두려움과 경계, 공포의 대
상으로 인식하여 불필요한 감정을 키울 뿐이다.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다. 무엇을 위해 허상에
대한 믿음을 이렇게까지 키우는 걸까? 스스로를 속이면서, 혹은 스스로에게 속으면서 우리는 어떤 것들
을 잃고 있을까?
고립과 연대. 이 둘 사이에는 묘한 접점이 있다. 고립도 연대도 어떤 외부적 조건에 앞서 스스로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몸이 흘리는 땀을 힘든 노동 때문에 생기는 끈적한 분비
물로만 인식하는 누군가는 활력 넘치는 달리기에서 얻게 되는 기분 좋은 땀을 모른다. 외면하고 부정한
다. 그렇게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상쾌함, 성취감과 같은 육체 활동의 즐거움을 자신으로부터 거
두어 버린다. 삶에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으로부터의 단절과 그로 인한 고립은 이렇게 그 누구도 아
닌 자신에 의해서 시작되기도 한다. 한편, 자기 신체의 허약함에 좌절하여 스스로 자기 한계를 정해 두
고 긴 시간을 살아온 어떤 이가,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자신이 연속해서 세 시간도 거뜬히 걸을 수 있는
좋은 체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새롭게 대면하게 된다면 그는 어떤 기분이 들까? 참 복잡한 감정을 느끼
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사실로서의 자신과 자신이 인식해 온 자기 모습과의 차이, 그 불일치에 대
한 발견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 있는 여러 형태의 자기모순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 줄 수
있다. 어쩌면 최소한의 연대는 이처럼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을 마주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
점에서 생겨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사실 그대로를 볼 수 있을 때, 그것이 감정이든, 인식이든 자기 안
에 존재하는 유령과 같은 것과 이별하는 순간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다. 다른
이만이 나의 뒷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통로> 연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인물의 뒷모습은 고립과 연
대의 단서를 이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거나 혹은 스스로 보고 싶지 않
은 자신의 진실을 뒤편에 숨겨둔 존재의 뒷모습, 그리고 이 뒷모습에 시선을 보내는 타자라는 존재의
암시로서.
전시실 한켠에 놓인 몸통에서 분리된 나무뿌리의 형상을 보며, 또 어딘가에 있을 뿌리를 잃은 나무 몸
통의 존재를 그려본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물과 묘하게 닮은꼴인 뿌리를 잃어버린 존재들에 대해 생각
해본다. 사람이 뿌리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결핍으로 인해 본래의 자신
과 단절되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본연의 모습을 잃은 채로 살아가는 상태가 아닐까 싶다.
늘 허기를 느끼는 이들, 몸 어디선가 피가 흐르고 있어도 그것을 모른 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존재의
모습은 얼마나 슬픈가. 어떤 면에서 고립과 고독을 제대로 마주한다는 것은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굶주림을 알아채고, 어디에선가 흘리고 있는 피를 제대로 감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래서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 <숲이라는 이름에 묻힌 나무>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안녕, 잘 지내?"는 지
금 이 순간, 우리 자신에게 한 번쯤 던질 필요가 있는 물음으로 들린다. 당신의 고립은 어떤 형태인지?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겪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스스로와 진정 연결되어 살아갈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