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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연 미술사
현대미술에서 자연은 어떠한 방식으로 수렴되는가? 최근 포스트휴머니즘이나 트랜스휴머니즘 등의 개념은 고전적인 휴머니즘이 상정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적인 관계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해체하여 왔다. 자연을 훼손시킨 인간의 자기반성이 고전적인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약간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그런데도 인간이 얼마나 자연 앞에서 낮아질 수 있는가? 아니, 자연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태도를 버릴 수 있는가?
위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단편 실험영화와 미디어아트, 사진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활동해온 2인 작가 공동체, 김시연과 박서은의 최근 미디어 설치 작업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지난 1년간 작가가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머무르면서 마라도와 제주도 근방을 사진과 영상으로 촬영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특정한 장소에 머물면서 인간이 남기고 간 흔적을 긴 호흡으로 기록한 전작 <도시의 욕망 삶: 아파트>(2019)의 연장선상에서 자연 속에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인간의 잔재와 무엇보다도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김시연과 박서은의 <각자의 방식>은 미술관에 오브제로서 썩은 나무를 들여오고 전시하는 지난한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는 마라도 마라리 73번지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보존하고 있던 바닷가에 떠밀려온 썩은 나무 그루터기를 미술관에 들여오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다룬다. 썩은 나무의 그루터기를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라도에서 제주도로 옮기기 위하여 배에 싣는 과정, 운송 트럭이 포물선을 그리면서 미술관 뒤쪽 입구에 서서히 도착하는 과정, 마침내 미술관에 도착한 그루터기를 소독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방식>은 현대미술관에 오브제로서 자연의 한 단면인 썩은 나무가 들어오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그뿐만 아니라 썩은 나무를 미술관 외부에서 세심하게 소독해서 미술관에 들여오기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도 보여준다. 불현듯 드는 생각은 만약 썩은 나무에서 벌레를 박멸해버리면 과연 썩은 나무의 생태학적인 변화는 사라지는 것인가?
김시연과 박서은에게 자연은 전시 제목인 ‘空의 매혹: 고독과 고립’이 연상시키는바 인간의 고립을 치유해주고 극복하게 도와줄 “기능적인” 자연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자연을 현 인류가 직면한 문제점을 해결해줄 대안 체제나 매개체로 제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각자의 방식>은 자연을 인간의 시각에서 유용하고 변형해온 관습을 그대로 따른다. 물론 그 이율배반적인 의미, 즉 자연을 보호하고 전시하기 위하여 자연을 해칠 수도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말이다. 게다가 각종 디지털 수법이 만들어낸 가상적인 자연풍경은 이제 더는 낯설게 보이지 않는다. 과연 현재 시각예술에서 자연, 인간, 현대미술은 어떠한 관계 속에 놓여 있는가? 그리고 현대미술관은 어떻게 자연을 들여오고 있는가?
숲의 드론 시점:
김시연과 박서은은 국내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와 미디어아트, 영화와 미술의 경계선에서 작업하여 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다큐멘터리 영화, 미디어 영상설치, 사진, 사진 설치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전시장 1층에 놓인
통상적으로 미디어아트와 생태예술의 소재를 결합한 예술은 자연의 형태를 재현하거나 생태계의 변화를 직접 관객이 체험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미술에서 ‘자연’을 수용한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의 감각기관은 큰 역할을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던 미국의 1960년대 히피(hippie)가 자신의 감각이 가장 자연적인 상태에 이르기를 원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의 이미지는 파편화될지언정 끝내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 주체의 시점은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인문과학자들은 인간의 주체성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소멸되고 자연에 대하여 억압적이고 지배적인 관계를 갖지 않도록 제안해왔다.
결과적으로 김시연과 박서은의
특히 생태예술과 디지털아트를 결합한 에코 디지털아트(eco-digit art), 혹은 디짓-에코 아트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기적인 생태계에 순응하듯이 인간들이 자신의 환경에 최대한 순응하는 상태에 이르도록 관객을 유도하는 것이다.
미술관에 자연물은 어떻게 들어오는가?: ‘마라 73’
김시연과 박서은의 작업에서 자연은 단순히 치유를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대상에 가깝다. 창작자의 시선을 투영하는 대상 말이다. 자연 그 자체가 아닌 인간과 관계 맺기의 하는 한 방편으로 자연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렇다면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자연은 어떻게 미술관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 <각자의 방식>은 썩은 나무 그루터기를 미술관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을 기록한 36분짜리 담담한 미니 다큐멘터리이다. 그러나 매우 담담하게 기록된 <각자의 방식>이 제기하는 질문은 단순하지만은 않다. 미술관에 들어오는 자연은 어떤 상태이어야 하는지, 과연 미술관에 들여온 자연의 파편은 순수한 자연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 등등 다양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각자의 방식>은 자연물 자체를 숭배적인 물건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미술관으로 들어와서 소중한 물건이 되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 관찰자, 해설자로서의 작가뿐 아니라 조력자로서 전시를 꾸리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운송자, 미술관 직원들도 등장한다. 심지어 관장님도 애정이 어린 눈으로 운송차에서 그루터기가 내려지는 과정을 지켜본다. 작가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그야말로 미술관에 작업이 운송되는 체계와 상황을 친절하게 보여준다.
두 번째로 자연물이 미술관에 들여올 때 행정적으로 필요한 과정이 있다. 자연물을 자연의 ’순수성’을 담은 매개체로 전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 미술관에 들어오기 위해서 자연물은 미술관이 정하는 물리적인 크기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실제로 썩은 그루터기가 미술관에 도착한 후 마당에서 나무의 밑동을 잘라야만 하였다. 나무의 뿌리와 기둥이 붙은 상태로는 미술관 전시장에 들어갈 수가 없기에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물론 썩은 그루터기 단면에 소독약도 쳐야했다. 여기서 소독약을 친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소독약을 쳐서 깨끗해진 그루터기는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인위적인 상태인가, 자연적인 상태인가?
세 번째로 박서은 작가는 소독약을 뿌렸고 나무를 잘라냈지만, “단면을 보면 아직도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 같다고, 아니 살아 있다”라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그런데 어차피 미술관 내부로 자연물이 들어온 이후의 과정은 생명체에 제 2의 삶을 부여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미술관에서의 삶, 혹은 미술의 오브제로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심폐소생’의 과정이 필요하다. 배경으로 설치된 영상 <그리고 사라지듯이> 앞에 조각은 어두움 속에 놓여 있다. <피로: 마라 73, 잃어버린 조각들>을 제작하기 위하여 그루터기를 붉은빛이 쬐는 선반의 한가운데 위치시킨 장면은 생명을 회복하는 조치가 취해지는 수술실을 연상시킨다. 또한 <피로: 마라 73, 잃어버린 조각들>의 나무의 표면에 빛이 닿게 되면서 나무의 표면에서 빛이 서서히 꿈틀거리면서 환영이 만들어진다. 빛이 나무의 결과 만나면서 음영에 따라서 역동적인 효과가 만들어지는데 멀리서 보면 심지어 나무가 살아 있다는 일시적인 착각을 하기도 한다.
물론 현대미술에서 자연의 잔재 그 자체를 뒤샹의 레디메이드처럼 미술관으로 들여오는 일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60-70년대 대지예술의 선구자인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의 장소 특정적인 설치물은 자연환경에서 결국 없어졌거나 없어지는 과정에 있다. 미국 유타 솔트레이크 호수에 설치된 <나선형 방파제(Spiral Jetty)>의 경우 지난 50여 년간 밀물에 쓸려서 형체를 잃어가고 있으며, 2000년대 초부터 디아예술재단은 방파제가 그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보다 앞서 1970년 미국 켄트대학교의 교정에 스미드슨이 설치한 썩어가는 그루터기 〈부분적으로 묻힌 장작 헛간〉(1970)는 결국 극심한 냄새와 치안 상태가 문제가 되어 1975년 예술가의 재단과 대학 측의 합의 하에 영구적으로 철거되었다. 물론 철거된 이후 학교 측은 이제는 사라진 스미드슨의 장소특정적 조각에 관한 각종 기록을남겨 놓고 사라진 자연물을 감상하는 대안적인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미술관 밖 자연물 예술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기록물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대지예술을 경험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자리잡았다. “Kent State Celebrates 50 years of early Robert Smithson Land Art located on campus,” https://www.kent.edu/kent/news/kent-state-celebrates-50-years -early-smithson-land-art-located-campus (2021년 5월 20일 접속).
썩은 나무가 주위 이용자들의 반감을 샀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연 생태계의 물건을 그대로 미술품으로 수렴하려는 시도 자체가 지나치게 무모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미술은 그 무모함을 통하여 예술의 물질성, 예술작업의 영속성, 예술작품과 자연물의 경계를 문제시 해왔다.
마찬가지로 자연생태계의 흐름과 변화에 순응하려는 것이 생태예술의 중요한 목적이고 이를 통하여 미술의 존재 방식에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면, ‘마라 73’이 제기하는 질문에 답을 하기가 만만치 않다. <피로: 마라 73, 잃어버린 조각들>에서 이름이 붙여지고 보관되며 미술관으로까지 유입된 ‘썩은 그루터기’의 긴 여정을 보면서 관객은 현대미술이 제대로 자연과 만나기 위해서, 자연물이 미술관에 들여오기 위해서 어떤 과정과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지를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각자의 방식>은 자연을 인간의 방식으로, 즉 미술관의 체계에 따라 수렴할 수밖에 없는 생태예술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나아가서 자연물의 순수성이나 날 것의 여부보다 인간의 문화와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해주기도 한다. 자연의 순수성을 누가, 어떻게 논할 것인가?
순수(?) 자연 : <집>과 <아우라룸>
김시연과 박서은의 ‘에코 디지털아트’는 자연을 활용하고 관찰하면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손과 관점이 배제된 ‘순수 자연’의 상태는 불가능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아니, 마라도 섬의 이곳저곳을 방황하듯이 기록하면서 관찰자의 정서적 상태를 독백으로 읊어낸 영상 <드라이브>(2021)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선’은 계속 파괴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관찰자와 타자, 인간과 자연의 두 영역은 구분되지만 동시에 ‘붙어 있으며’ 비탈길 ‘중앙선’을 달리는 자동차는 그 선을 계속 넘나들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에서 영상이나 설치와 함께 사진이 전시되었다.
<집>과
<집>과
보는 이의 심상을 반영하기 위하여 자연 풍경을 사용하는 것은 미술에서 오랫동안 인간이 자연을 소비해온 방식이다. ‘자연을 보는 법’이 작가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확신시켜주는 대목이 또 하나 있다. 설치 작업 <아우라룸(Aura Room)>(2021)은 빛을 사용하고 있지만, 정확히 관객이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빛의 움직임과 굴절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장애물을 빼고 파악된 것에 불과하다. 작은 구멍을 통해서만 관찰되는 방안의 빛은 우리의 시각이 일정 부분 차단된 후에 남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이 전체 자연의 모습 중의 일부분이라면, 상징적인 의미에서 <아우라룸>은 우리가 자연을 보는 방법, 아니, 보도록 강요된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가 보고 있는 자연은 신기루나 환영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우리가 자연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인가?
디지털 시대의 자연: 우리시대 자연(생태) 미술의 조건
산업화 이후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고전적인 휴머니즘이 집착해온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하면 영원히 망가진 자연을 회복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에서 자연은 상상력의 중요한 원천이자 애증의 존재이다. 사회운동으로서의 생태운동과는 별개로 예술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훨씬 복합적이다. 아니 복합적으로 상정하는 것이 결국 예술에 이로울 것이다. <아우라룸>에서 작은 구멍을 통하여 방안에 놓여 있는 빛의 움직임을 관찰하듯이 자연과 무관하게 인간의 행동이 자연을 미학적으로 규정하고 수렴하며 변형시켜 왔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현대미술가들은 다양한 미학적인 성취를 해왔다.
특히 각종 시각적 생산물의 변조도 한층 손쉽고 정교해진 시대, 인위적으로 빛의 흐름을 가리거나 노출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 다큐멘터리 사진과 예술사진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 진짜와 가짜, 날것의 자연, 인간의 눈과 솜씨를 통하여 ‘순수’하거나 변조된 자연물 사이의 구분을 짓는 일이 어려워졌고 심지어 불필요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오히려 비(非)자연, 유사(類似)자연은 인간이 자연을 인식해온 방식이나 자연을 보는 법에 대하여 새롭게 깨닫게 해준다.
따라서 현대미술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설정이 다른 분야와 달라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자연이 결국 인간의 감각, 감정, 정서적 상태의 반영이라는 너무 오래된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고치거나 회복할 수 있는 개체라기보다는 인간 인식의 조건과 한계를 드러내는 수단이라는 점을 김시연과 박서은은 다시금 일깨워준다. <드라이브>에서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으면서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는 각각의 필요에 따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밖에 없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을 잘 보여준다. 오래된 휴머니즘 자체를 공격하기 전에 자연물과 문화, 예술 간의 관계를 재조명해보는 것이 우리 시대 자연이 미술관에 들어와야 하는 중요한 명분이자 조건이 되고 있다.
Meri-Helga Mantere, “Coming Back to the Senses: An Artistic Approach to Environmental Education” (2004); www.naturearteducation.org (2021년 5월 20일 접속).